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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보고듣기

부끄러운 역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

 

 

 

인도네시아는 몇 년 전 미국에서 만난 한 오빠에게서 들은 게 전부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거기에 가면 가정부들 고용하고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자기가 거기 살았었는데 가정부가 팬티까지 다려줬다고. 이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팬티는 다릴 필요가 있는 '옷'에 속하는 것인가 의아해 했었다. 그리고 도대체 다릴 필요가 없는 팬티까지 다려주는 가정부가 사는 인도네시아란 나라는 왠지 비합리적인 나라일거란 상상을 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인 '액트오브킬링'을 보고 나서야 인도네시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과 너무나 닮은 그 모습 속에서 너무나 많은 생각이 오갔다. 1965년 100만명의 공산주의자가 학살된 사건의 주도자들(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학살을 주도한 인간들은 정치인이었겠지만)의 이야기다. 게다가 그 가해자 및 주도자가 정치권력을 잡고 있는 것이 현재 인도네시아다. 그러므로 학살을 행한 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학살을 자랑스러워하고 지금도 그 권력을 이용해 골목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내며 당당히 살아간다.

 

 

정치는 민중들의 삶을 보듬어 안는 수단이 아니라 내 집에 수천불의 리미티드 상품을 전시해 놓을 수 있는 대박 로또에 지나지 않는다. 의원들, 군정권의 호위를 받는 무장단체의 간부들 집에는 온갖 사치품과 멸종위기의 동물을 사냥해 박제해 놓은 전시품이 가득하다. 이런 나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승자의 이야기,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의 말은 백번 옳다. 그 어떤 파렴치하고 무자비한 짓을 한 자라도 그 역사를 비판하려는 외부 세력이 없고, 오히려 무자비한 짓을 부추기는 세력이 득세라면 자신의 행동을 비판할 확률은 0%에 가깝다. 이런 경우 유일하게 비판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것이지만, 가해자로서 수백명을 죽인 사람으로선 죄책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최대한 피한다.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므로 부끄러운 짓을 부끄럽지 않게 계속하게 된다.

 

 

이렇게 당당하게 부끄럽고 잔인한 짓을 계속 하는 데에는 민중들의 무지함과 무력함도 한 몫한다. (물론 민중들의 무지함은 제대로된 역사 교육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고 무력함 또한 어쩔 수없는 체념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연하게 선거철이 되면 사람들에게 돈과 선물을 뿌리고 또 가장 뇌물을 많이 뿌린 인간을 정치인으로 뽑아주는 민중들이 있기에 말도 안되는 정권은 계속 그 명맥을 이어간다. 간혹 이러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정부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공산주의자(즉 빨갱이)로 몰아서 처단한다. 그 처단에 앞장서는 이들이 정부의 호위를 받고 있는 깡패나 다름없는 무장단체들이다.

 

 

아. 왜 이렇게 우리 나라와 닮아 있는 것일까. 냉전을 겪은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은 대체로 이런 과정을 통해 미국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교묘히 돈으로 국제 정세를 흔들어 놓은 미국에게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빨갱이 운운하며 이념전쟁만 하고 있는 정치판, 그 이념전쟁을 그대로 내면화한 수많은 민중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희망이란 단어는 어떻게 써야하는 건지 막막해진다. 뭘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개인으로서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부끄러운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당당하게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된다. 부끄러운 역사를 미화시켜 자랑스럽게 여기면 안되는 이유이다. 이든이와 단이 세대를 위해서 지금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끄러운 역사를 부끄럽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가르치는 일이다. 이 부끄러운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라고 교훈을 주는 일이 진정 자랑스러운 역사 교육일 것이다.

 

 

영화에서 인상깊은 장면 중 하나가 생각난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학살 경험을 직접 영화로 만드는데, 그 영화 속 장면이다. 학살자 리더에게 살해당한 희생자가 자신을 목조른 전선을 내던지고 주머니에서 금메달을 꺼내더니 학살자 리더의 목에 걸어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자기를 죽여서 천국에 보내 준데에 깊이 감사한다고. 친일과 독재의 역사에 금메달을 걸어줘서는 안 될 일이다.

 

덧붙임. 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다. 학교에서도 민주화나 독재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모르는 세대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여기면서 살았다. 요즘들어 다른 나라의 다양한 종교적, 정치적인 독재와 차별을 접하게 되었는데, 21세기에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이런 반인권적인 일들을 보면 남 일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 민주화 운동이 없었다면 우리도 지금 저랬을거야 하면서 말이다. 백주대낮에 버스에서 윤간을 당하고 살해되는 인도의 여성들, 자식이 보는 앞에서 강간당하는 아프리카 내전 중인 어느 나라의 엄마....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이나 수천명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이상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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