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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생각

무의식적인 생각과 습관에서 벗어나기 (1) - 외로움

   결혼하고 미국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생각은 '내가 혼자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공부하느라 바빠서 나를 도와줄 수 없으니, 내가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관리하고 밥과 빨래, 청소를 해야 한다는 생각. 이 생각은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나는 모든 집안일을 완벽히 해내야 하는 것이다. 오 맙소사-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이미 생각만으로 질려버린다. 정말 부담스럽고 끔찍한 얘기 아닌가.

얼마전 남편과 깊은 얘기를 하면서 이런 생각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대안적인 사고를 개발할 수 있었다. 우선 이 생각은 '내가 혼자/집안일을/해야한다' 세가지 부분으로 쪼개볼 수 있다. 이는 각각 외로움, 편견, 완벽주의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나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


외   로   움


1. 어느날 밤 터진 일

첫번째로 다룰 부분은 '내가 혼자' 라는 생각이다. 혼자 모든 일을 도맡는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너무 외로웠다. 남편이 거실에서 공부하는 동안 혼자 부엌에서 밥을 짓다보면 문득 서러움이 밀려오곤 했다.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각자의 일상에 묻혀 있는 모습이 싫었다. 게다가 기말이 되자 남편은 밤낮이 바뀌어서 내가 잘 땐 남편은 깨어있고, 남편이 깨어있을 땐 난 잠을 잔다. 함께 밥을 먹으려면 자는 남편을 구태여 깨워야 하기 때문에 때가 되면 혼자 점심 저녁을 먹고 남편이 깨면 또 한번 식사를 하기도 하고 그랬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이방인처럼 낯설고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남편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함께 나누었다. 그 때 나누었던 이야기를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어떤게 힘드냐고 여러번 묻고는 참을성 있게 내 대답을 기다리는 남편에게 내가 뱉은 말은 '너무 외롭다'는 말이었다. 힘들었던 그 날, 난 결심했었다. 나의 가장 좋은 친구는 나 자신이라고. 그 누구도, 가족도 남편도 친한 친구도 날 정말로 외로움에서 건져줄 수는 없다고.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옆에 항상 있어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고. 다른 사람이 모두 나를 떠나도 나 자신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 자신을 믿고 든든한 버팀목으로 삼으리라고 결심했다.

이런 내 생각을 들은 남편은 크게 낙심했다. 내가 내 옆에서 나를 지지해주고 사랑하는 남편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했기 때문이다. 너무 고마운 남편의 사랑이 나에겐 한없이 부족하다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얘기를 듣고 힘없이 '그럼 나는 뭐냐'고 말하는 남편을 보고 나서야 퍼뜩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내가 힘들다고 호소할 때마다 남편은 항상 내 옆에 있었다. (이런 메카니즘 때문에 내가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 때마다 힘들다고 호소하는 것 같다. 다음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어야 할 것이다.) 내 얘기를 인내심있게 들어주고 날 보듬어주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다. 이런 사람을 내가 또 잊고 있었다.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남편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이 되는 나. 연애 시절부터 이런 패턴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2. 애정결핍증후군의 원인과 해결


2.1. 애정결핍의 원인

왜 나는 타인의 사랑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려고 하는걸까?

이 문제는 예전에 미술 숙제에 관한 포스팅에서도 나왔었다. 교수님의 칭찬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숙제에 대한 스트레스가 말도 못했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한마디로 애정 결핍이다. 나같은 애정결핍형 인간은 타인의 애정을 끊임없이 갈구하는데 그 이유는 내 가치를 타인에게 확인받기 전까지는 내가 나를 인정 또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타인의 애정을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 나는 나 자신을 정의할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오면 내가 과연 괜찮은 인간인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진다. 계속해서 타인의 애정을 확인하지 못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증폭되고, 그렇게 되면 '날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라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나아간다. 그 후에는 이 세상에 나 혼자인 것만 같은 절대적인 외로움이 파고든다. 정리하면, 애정 결핍의 원인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 결과는 외로움라고 할 수 있다. 이 외로움은 내 존재를 통채로 집어삼킬 정도로 크고 깜깜하다. 끝없는 우주 공간에 버려진 미아같은 느낌이다. 밑도 끝도 없는 암흑의 공간을 혼자 영원히 떠다녀야 하는.


2.2 애정결핍의 해결 (1)

그 날 밤, 내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이런 상황이 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든다. 이 외로움의 구렁텅이에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 누구도 없었지만 내가 알 수 있는 확실한 한가지 사실은 그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믿고 선택한 타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내가 외로움을 비롯해서 그 어떤 기쁨, 슬픔, 분노를 느끼던 간에 나를 떠나지 않고 떠날 수 없는 존재는 나 자신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놀랍게도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내가 믿고 기댈 기둥이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존재한다는 안도감이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했지만 나는 '나는 절대적으로 혼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발견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오히려 변덕스럽고 통제 불가능한 타인의 애정을 확인했을 때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든든한 힘이었다.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내가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변덕스러운 타인의 사랑은 믿지 말고 너 자신을 믿어라'는 생각과는 분명 다르기 때문에 아직 더 다듬어야 할 테지만. 만약 나를 믿고 의지한다는 생각이 좀 더 발전되어 '나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자.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버리고.' 로 변한다면 참 좋을 듯하다. 이보다 더 좋은 명제가 있을테지만 그 것을 발견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2.3. 애정결핍의 해결 (2)

외로움을 이야기하다 보니 수많은 다른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남편이 얘기했었듯이 한가지 문제는 다른 모든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번에도 출현한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다른 문제를 다룰 때에도 수없이 나왔었다. 거의 대부분의 문제가 이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 것 같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나는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해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던 그 기준은 '내가 행복한가 아닌가'이지 '다른 사람이 행복해져서 나를 인정해 줄 것인가 아닌가'는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사용한 기제는 타인의 기분과 행동이 나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기제는 나의 특정 행동으로 인해 타인이 만족하고 그 만족의 결과로 나를 사랑하므로 내 기분이 좋아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나의 행동과 기분 사이에 타인의 기분과 행동이 끼어 있는 셈이다.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도식 1>




도식을 그려보니 나의 문제점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화살표가 없는곳은 나의 행동과 나의 기분 사이이다. 도식에 따르면 나의 기분은 타인이 나를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변하는 수동적인 상태이지, 내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내가 적극적으로 느끼는 행복이 아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을 받는 방법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인정이 없다면 나도 행복하기 어렵다. 이는 내가 타인의 애정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기제를 사용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행복하기가 극도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기분이나 행동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통제 범위 밖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내가 얼마만큼 노력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우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최대한 노력하면서도 행복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할 수도 있고, 내가 별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나를 좋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얻어 걸리는 후자의 경우는 그렇다치고, 전자의 경우는 참으로 비참하다 하겠다. 따라서 나는 타인의 마음에 들려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전자의 상황이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이렇듯 내가 타인을 만족시키는 과정은 두려움과 고통을 수반한다. 물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의도는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넘어서지 않는다.

이제 어찌어찌 각고의 노력 끝에 타인의 인정을 얻어냈다고 해 보자.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도 계속된다. 타인의 인정이란 대단하다는 말 한마디, 부러움의 시선 따위이다. 내가 얻으려고 하는 인정과 사랑은 그런 식의 칭찬이나 질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얻을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여기에서 그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간에 나를 사랑해 주고 진심으로 배려하는 타인의 따뜻한 마음임에도 내가 하는 방식으로는 이런 따뜻함을 받기 힘들다. 아마도 내가 다른 사람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은 '어떤 일을 얼마나 잘, 완벽하게 처리했느냐'이지, '다른 사람을 얼마나 배려했는가'가 아니기 때문인 듯 하다. 결국 난 번지수 잘못 찾아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타인의 따뜻한 사랑, 그리고 나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다시 도식을 그려본다.

<도식 2>




본 도식과 첫번째 도식의 가장 큰 차이는 나의 기분이 나의 행동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나의 행복은 더 이상 타인의 인정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내 행동의 직접적인 결과이고, 내가 행복해지려 한다면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멋진 뜻이기도 하다. 더 이상 나의 행복은 변덕스럽지도 불안정하지도 않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할 수 있고,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얼마나 큰 자유인가!

두번째 차이는 타인의 따뜻한 애정이 내가 타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참된 상호작용에서 얻어지는 부수적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첫번째 도식에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애정이 들어설 자리가 거의 없다. 첫번째 도식은 '주고받음'을 기본 전제로 하는 인간관계이다. '내가 너를 만족시켜주었으니 너는 나를 인정해라'라는.  마치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것처럼 기계적이고 산술적인 관계이다.(일전에 남편은 내 인간관계가 기계적이라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주고 받는 것을 확실히 계산하려 한다고. 이 문제 또한 여기에 연결되고 있다. 놀랍다.)

기계적인 인간 관계를 벗어나 새로운 도식을 그리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다른 사람을 정말 배려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 없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생각을 해 봐야 할 듯 싶다. 남편과 얘기도 더 해보고. 공 사상이나 예수님의 삶도 도움이 될 것이다. 참된 인간 관계를 고민하고 실천하다 보면 그렇게 힘들었던 외로움 또한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3. 앞으로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꽤 멀리까지 온 듯 하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생각도 깊어지고 어느정도 정리도 되어 기분이 참 좋다. 지금까지 했던 얘기와 관련하여 나를 자유롭게 해 준 남편의 말이 있다. '타인을 만족시키려 하지 말고, 올바른 길을 찾아 그것만을 추구해라.'는 말이다. 무엇이 다른 사람을 만족시켜 주는 지 생각하다 보면 갈팡질팡할 때가 많다.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길이 올바르고 참된 길인지 찾다 보면 차츰 눈 앞이 밝아지면서 상황이 명료해진다. 나를 있는 그대로, 타인을 있는 그대로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일. 이 것이 올바르고 참된 길일 것이다. 잊지 말자. 그리고 깨어 있자. 매순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