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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생각

미래에서 온 기독교를 읽고 (1)

정강길님의 '미래에서 온 기독교'를 읽고 나서 느낀점-


사건으로서의 예수

지금까지 연구되어 왔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지혜자 예수, 농부 예수, 변혁가 예수 등 한가지 모습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 또한 나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렇게 한 가지 모습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예수를 불가지론으로 갈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모습을 가진 예수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간단해 진다. 만약 예수가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무명의 죽음들, 그 사건들의 총체라고 한다면 말이다. 즉 예수는 사건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 사건이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다. 예수를 사건의 이름으로 본다면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은 2천년 전에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고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현장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나에게 이러한 관점은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예수를 2천년 전 태어나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죽어간 한 개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예전에 일어 났던 그 예수의 사랑을 모델로 삼아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지금 나의 일생을 예수라는 과거의 한 개인의 일생과 최대한 비슷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정강길님의 시각은 이러한 나의 생각에 숨을 불어 넣어 생생하게 해 주었다. 과거에 못박힌 예수가 아니라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예수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연합체로 볼 경우, 현재에 더욱 충실하게 될 수 있다. 예수라는 사건은 2천년 전에 한 번 일어나고 끝난 일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계속적으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지금 또한 예수라는 사건이 될 수 있다.

나의 지금이 예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만약 내가 어떤 순간 예수를 선택한다면 그 순간 내가 서 있는 시공간(현재)은 예수라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매 순간을 살아간다면 내 일생이, 그리고 내가 또 하나의 예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발상은 '성불'을 목표로 삼는 불교의 관점과도 매우 흡사하다. 내가 예수가 된다는 말이 기독교적으로는 신성모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신성모독은 나를 신의 위치에 올려 놓고 다른 모든 것을 비하시키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나는 내가 신이 아니고 예수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를 향해 최대한 노력하려 하는 것이므로 신성모독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아무튼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예수의 삶을 지금 나의 삶으로 다시 재현하는 일이다. 나에게 부처님과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나의 삶을 통해 이 분들의 삶을 드러내는 일이 나에게는 곧 부활이며 구원이요, 성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