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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생각

무의식적인 생각과 습관에서 벗어나기 (2) - 편견


'내가 혼자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의 문제점을 고치기 위한 두번째 글.
남편과 이 주제에 대해 대화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집안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내가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편   견


1. 집안일의 의미

  내가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듣고 자란 말은 '고급 인력은 집안일 대신 다른 생산적인 일(돈을 버는 일)을 한다'는 말이었다. 세상의 모든 똑똑한 사람은 집 밖으로 나가 일을 해 돈을 벌고 있으므로, 집 안에서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곧 능력없는 바보를 뜻했다. 따라서 똑똑한! 내가 할 일은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똑똑하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밥이나 짓는게 아니라, 집 밖으로 나가 돈을 벌거나 못해도 학교 다니면서 공부라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이런 바깥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처럼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이야기가 사실일까? 집안일은 쓸모없는 낙오자들이 하는 일이고, 돈을 벌고 학교를 다녀야만 내가 가치있는 인간이 되는걸까? 결론적으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안일은 돈을 벌고 공부를 하는 것만큼 중요하거나 또는 더 중요하다. 대체 세상의 그 누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옷을 입는 것이 삶의 토대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게 곧 이런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선 번듯한 집 한채 구입하고 밥, 청소, 빨래는 일하는 아주머니를 고용하면 되지 않느냐면서. (또는 여유가 없다면 어서 결혼해 집안일 잘하는 남편이나 부인을 두던가.) 하지만 난 이런 태도는 자신의 삶의 토대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직접 먹는 밥 한끼 짓기를 귀찮아 하면서 대체 밖에 나가 무슨 엄청난 일을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 몸이 최소로 필요로 하는 것조차 내 자신이 충족시킬 수가 없거나 아예 그런 시도조차 귀찮아 하는데 다른 누구를 구원하고 다른 어떤 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많은 훌륭한 분들이 이미 말씀하셨듯이, 쌀 한톨 물 한모금 속에서도 우주를 발견할 수 있다. 밥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깨어있으면서 할 수 있다면. 집안일은 하찮게 해치워야 할 일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는 일종의 제사와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내 삶의 토대를 값없이 마련해 준 자연에게 고마워하고 그 안에 숨겨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모든 희생과 노력을 돈 몇 푼으로 모두 지불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 돈은 그 고마움에 비하면 몇천분의 일도 안된다.


2. 집안일을 위한 삶?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의식주 해결은 그야말로 삶의 '기본' 토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된다면 삶은 먹고 사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삶을 위한 살림'과 '살림을 위한 삶'을 구분했다.

살림은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살림을 위한 삶은 없다. 살림은 지상에서 삶을 평면으로 넒고 크게 펼치자는 것이고 삶은 숨을 깊게 쉼으로서 신으로 더욱 높이 솟아오르자는 것이다. 살림과 삶의 관계를 다석은 평면을 나타내는 유클리드와 입체를 나타내는 비유클리드로 설명한다. “비유클리드의 진리가 대낮을 보이었건만 유클리드의 작도 속에서 좀 더 자겠다고 한다..... 살림만 크게 하랴다가는.... 살림에 치어 죽는다. 전에도 그랬고 후에도 그랬다. 쌀 속에 묻혀 죽는 생쥐와 같이.”  (다석 유영모, p.210)


나에게 '쌀 속에 묻혀 죽는 생쥐'라는 표현은 충격적이었다. 집과 차는 크면 클수록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과연 크고 많은 게 좋기만 한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 크면 클수록 챙겨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 집에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마음 쓸 일이 많아진다. 혹시나 벽에 얼룩이 지지는 않을까, 바닥에 흠집이 생기는 건 아닐까 불안불안하다. 면적이 넓어지고 들어선 물건들이 많으니 청소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더 들어가야 한다. 예전에 100여평 되는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집에는 심지어 국자 아래마다 값비싼 국자 받침이 놓여 있고(싱크대에 국물 자국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리대는 모두 대리석이라서 유리 그릇을 놓을 때에는 깨지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레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찬장마다 수입 그릇들이 열을 갖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집에서 밥을 잘 해 먹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쓰임을 하지 못하는 그 그릇들처럼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도 꼭 그 집안을 장식하는 한 부속품처럼 보였다. 사람이 물건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들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 쌀 속에 묻혀 죽는 생쥐라는 말이 이런 말인 듯 하다.


3. 살림을 토대로, 그리고 토대를 넘어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은 간단한 의식주를 해결 수 있는 데까지만 필요하다. 의식주를 계속 늘리려고 욕심을 부리면, 그것들을 관리하기 위해 내 마음을 쓰고 다른 사람의 수고를 빌려야 하는 폐를 끼쳐야 한다. 살림을 불리고 관리하는데 온 에너지를 쏟는다면 정작 다른 중요한 일에 쓸 시간도 에너지도 없어진다. 살림은 최소로 하되 온 정성을 다해 그 일을 하고, 남는 에너지와 시간은 삶을 위해 쓰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다면 삶은 무엇일까?   
우선 집안일(살림)을 빼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들 수 있겠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을 발견하고 하나씩 해보는 것이다. 신나게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신나게 하는 것-
하고 싶은 일도 있지만 해결해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살면서 닥치는 문제들을 고민하고 현명하게 해결하는 것도 삶의 일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할 일들을 통해 (그리고 집안일도 포함하여) 올바른 길,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사랑을 나누어 주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이것이 내가 심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고, 또 수많은 다른 학문들- 종교, 과학, 철학, 예술 등등- 을 접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게 하려면 게으름과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어려운 일에는 맞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익숙하지만 내 성숙에는 도움이 안되는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주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려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바꿀 수 없음과 있음의 차이를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신학자 Reinhold Niebuh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