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래전 1998년도에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한길사)을 읽고서 쓴 글이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논의되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정보 제공과 참조 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린 글임을 밝혀둔다. -정강길)
1. 들어가며
98년 8월 12일자 <뉴스위크>를 보면 '과학과 종교의 절묘한 조우'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나온 적 있다.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바야흐로 회의(懷疑)에서 출발하는 과학과 믿음에서 출발하는 종교가, 하나의 지평에서 만나게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상대를 부인하는 적대관계였지만, 이제는 과학과 종교가 상호적으로 관계되면서 이전의 근대성에서 벗어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우리 가운데 불러일으켰다. 앞으로 과학자들은 종교인들과 더는 골치 아픈 싸움에 휘말리지 않아도 될 것이며, 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심과 과학적 사유의 충돌로 인해 혼란에 빠지는 일 또한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을 파면 파고들수록,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종교적인 섭리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점점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 과학과 종교의 대립과 갈등
근대 세계의 인식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인간의 '생각함'을 주체로 내세우면서 중세 신앙이 갖고 있던 사유의 벽을 깨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 과학의 발달을 촉발시키는 데에 그 철학적 근거를 세웠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를 이원론적으로 보는 인식의 이러한 흐름은 과학과 종교를 점차 분리시키면서 그 골을 계속 깊어만 가게 했다.
이때 등장한 세계관이 우리가 흔히 잘 아는 이신론적(理神論的) 세계관이다. '이신론'이란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할 때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이치를 창조하여, 신은 이 우주가 돌아가는 일에 손을 떼버렸다는 신관이다. 그래서 당시 갈릴레오는 이 우주를 가리켜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신론은 근대 자연과학자들이 유신론자들의 눈치를 보며 궁여지책으로 짜낸 유물론을 향한 유아기적 항변이요 음모라고 할 수 있겠다. 17세기에 등장한 뉴턴 물리학은 과학적 유물론의 결정판이자 인간 이성의 위대성에 대한 절정을 이뤄놓았다. 뉴턴 물리학이란 그 옛날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의 세련된 예증에 다름 아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들만이 인정받는 이러한 분위기는 끝내 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과 유물론을 본격적으로 등장시켰고, 과학과 종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로 치닫게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두드러지게 과학과 종교를 대립적으로 보면서 이를 경시하고, 더러 기독교 신자에 처해있는 과학전공자들 가운데는 신앙이라는 명목 하에 분명하게 일반화된 사실조차 조작한다. 과연 과학과 종교는 서로를 부정해야만 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가?
3. 떼이야르가 말하는 우주의 진화
▲ 'Pierre Teilhard de Chardin'(1881~1955) | ||
여기에 대해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20세기 초에 일찌감치 해결책을 제시했던 자 중에 하나가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이라는 학자이다. 그의 실존적인 삶의 자리가 이미 프랑스의 종교신부이자 고고학자요, 지질학자며, 생물학자였기에 이 심각한 주제와 그는 필연적으로 부닥치게 되어 있었다.
그는 물질을 얘기하는 과학의 비물질성을, 또는 종교에서 말하는 정신에너지(얼)의 물리적·생물학적 작용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며, 다가올 21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유효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가 기술하는 우주는 정태적이고 불변적인 정지한 우주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상에 있는 역동적인 우주이다. 특히 그의 대표적 저서인 「인간현상」(1939)은 이를 잘 얘기하고 있다.
태초에 우주가 발생하고 태양의 파편으로부터 나와 형성된 '청년지구'는 무기물과 유기물을 구성하면서 생명 현상을 출현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떼이야르는 무기물계와 생명계라는 두 세계는 본래부터 한 몸이었다고 한다. 단세포 단계에서는 동물과 식물의 구분이 불분명하듯이, 그것은 낮은 단계에서는 모호하고도 희미한 존재로 있었을 뿐이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떼이야르는 이것을 '이른 생명'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사물의 바깥만을 살피는 자연 과학으로 볼 때에 그것이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적어도 세포가 출현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른 생명이 '생명'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생명은 적극적으로 팽창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계통수의 생물을 번식시키고, 영장류의 진화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인간현상을 태동시킨다.
사람은 조용히 등장했다. 사람의 등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곧 ‘생각’의 등장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을 대상으로 놓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헤아릴 줄 아는 '반성'의 능력을 갖고 있다. 여기서부터 진화의 흐름은 이제 정신의 적극적인 진화에 돌입했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얼누리'(=정신계)의 형성이다. 사람 이전에 얼은 있었어도 얼누리는 없었다. 사람의 등장과 더불어 이제 본격적인 '정신의 진화'에 돌입한 것이다.
사람의 등장은 곧 정신사의 등장을 의미했다. 얼의 본격적인 진화는 이러한 얼을 하나로 수렴하는 양태로 나타난다. 즉 저마다의 무수한 생각의 알갱이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각 덩어리로 합일되는 것이다. 조화로운 집단의식, 그것은 곧 '초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사람이 모여서 '큰 사람'이 되는 차원을 의미한다. 세계의 미래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진화의 궁극점에 이르러 '큰 사람'의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큰 사람'은 개체의 특성을 죽이는 전체주의적인 집단의식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개체의 특성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커다란 자율적인 중심을 얘기한다. ‘생명’이 낳게 되는 ‘다음 생명’은 바로 이와 관련한다는 것이다.
4. 사랑, 존재의 진화를 성숙케 하는 창조적 에너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떼이야르는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만 사랑하지 않는다. 포유류에게도 모성애는 있으며, 하찮은 미생물에게도 사랑은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심지어 사랑은 물질의 미세한 분자에게도 있는 것이란다. 단지 그것이 낮은 단계로 갈수록 희미하거나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사랑이란 다름 아닌 나와 타자가 조화롭게 하나가 되려는 욕구다. 일반적으로 과학에서 말하는 끌어당기는 힘, 곧 '중력'이란 사물의 바깥에서 본 현상만을 얘기하며, 이에 상응하는 사물의 안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함으로서 결국은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중력은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 에너지야말로 생명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창조적 힘인 것이다.
그렇기에 떼이야르가 보는 개체의 생명은 개체의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명'으로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그 자신의 불완전함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우주적 그리스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떼이야르가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다.
나의 참다운 모습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러한 정신의 합일점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적 자아와 완벽하게 합일되는 차원이다. 이것은 나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지평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운데서 사랑으로 교통하는 차원인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 세계는 새 하늘 새 땅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태동될 것이며, 우리 자신도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화하여 있을 것이다. 마치 분자가 결합하여 개체인 분자 그 자신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세포하나를 출현시켰듯이 말이다.
5. 인류의 치명적 독인 낙관주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진화를 얘기하는 떼이야르의 사상이 한편으로 지나친 '낙관주의'에 기울어 있지 않나 생각할 수 있겠다. 분명 인간의 비극적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낙관주의는 인류의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떼이야르는 이르기를, 오메가 포인트의 성취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작동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거부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배제해선 안 된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오메가 포인트의 성취는 존재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자율적인 중심점'이기 때문에, 존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관계적 지평에서 연결되어 있는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미래는 나 자신의 책임성과 항상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곧 전체 인류의 미래와 진화에 관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있는 거대한 이 우주적 진화에는 존재의 책임성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하겠다.
6. 떼이야르 사상의 학문적 평가
이러한 떼이야르의 사상은 진화론적인 과학 사상을 얘기하면서도 그것은 신학과 철학의 파트에까지 닿아있다. 사실 떼이야르의 사후에도 한동안 그의 사상은 학문적 주소를 찾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사상은 전문적인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신비적이거나 사변적으로 보이고, 그렇다고 종교인이나 신학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신학 사상이라기보다 불경스런 생물학인 진화론에 치중한 것 같으며, 철학자의 눈으로 볼 때도 철학으로 인정하자니 철학사에 이같이 생물학과 지질학과 기독론이 짬뽕된 특출난 사상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그의 학문에 대해 번지수를 매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만큼 떼이야르 사상은 당시로선 독특하면서도 전체 학문을 아우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종교적 신앙은 과학적 사유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과학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적 사유의 끝에는 언제나 비합리적인 궁극성과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떼이야르의 사상을 과정(過程)사상에 포함시켜 평가하기도 한다. 떼이야르는 우선 기본적으로 이 우주를 유기체적 사태로 본다는 사실이다. 떼이야르가 보는 이 우주는 하나이기 때문에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이든 그 뿌리는 우주 전체와 관련이 있다고 얘기한다. 이 우주의 관계망에서 그 어느 것도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실체란 있을 수 없다.
이 우주에 단 한 번의 핵과 전자가 출현하여 수십억 년을 거쳐 서서히 진화해온 물질은 점점 조직화·복잡화의 단계를 거치며, 이 지구상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켰다. 이것은 물질의 진화 속에 '얼'(=의식)이라는 것이 항상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떼이야르는 사물의 바깥은 물질의 복잡화로 나타나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사물의 안은 '정신'으로 본 것이다.
자연과학은 그때까지도 사물의 바깥만 살필 줄 알았지, 사물의 안은 들여다 볼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침데기'처럼 내색은 하지 않지만, 분명 물질에는 안이 있다는 게 그 자신에게는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모든 존재 사물의 안과 밖을 말하는 떼이야르는 항상 이 두 가지 측면을 갖고서 총체적으로 이 우주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7. 성서문자주의와 창조론자들의 착각
오늘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창조론자들은 물질의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물질의 진화는 조직화·복잡화의 법칙과 관련하는데, 이것은 소위 말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의 질적 쇠퇴를 말한 법칙인데, 이것은 운동하고 있는 물체에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그 물체는 점점 그 운동성을 상실해 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달리는 자동차가 언제나 달릴 수만은 없으며,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는 한 그 자동차는 정지하고 말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곧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상응하는 개념이다. 즉 물질은 자연적인 반응으로 인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무질서해지는 쪽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열역학 제2법칙으로 인해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패러다임은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 사유체계가 되는가?
천만에! 20세기 첨단 과학이 밝혀낸 지성의 빛은 생명계와 같은 개방계에 있어서는 오히려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열역학 제2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노벨과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일리아 프리고진(Ilya Prigogine)의 명저인「혼돈으로부터의 질서」(1984)에도 상세하게 잘 나타나 있다.
떼이야르는 물질의 진화가 엔트로피 법칙에 맞설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의 '안'인 얼의 존재 때문이라고 말한다. 진화의 메커니즘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하며, 그 얼은 사물 '밖'의 조직화·복잡화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첨단의 과학인 양자 물리학의 세계에서도 물질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과학자들은 그것이 물질인지 비물질인지조차 헷갈린다고 고백한다. 놀랍게도 뉴턴 패러다임이 붕괴된 이후의 현대 물리과학은 오히려 물질에서 정신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창조론자들이 일면 똑똑해 보이는 소리를 한 것 같지만, 오히려 이들의 주장이야말로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사상임을 알아야 한다. 알다시피 창조론은 성서의 창세기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를 역사적 사실로 주장하여 하나님이 뚝딱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나타난 구절들을 우리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실제 사실로 보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고도 무지한 유아기적 발상에 불과하다.
설령 하나님이 뚝딱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치자. 그렇게 쉽게 만들 거였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수백억 년 동안에 수십억 번의 진화를 거듭하여 겨우 인간의 생명 하나가 태동하였다는 사실 쪽에 더 진중한 무게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리라. 놀랍게도 '나'라는 개체의 생명은 지금까지의 모든 우주 생명의 기운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에 생명의 존엄성과 그 자신의 섭리를 불어넣으시고 계신다는 놀라운 은총이 발견된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떼이야르의 주장은 물질의 우연적인 진화는 바로 필연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결부된 것이라고 보았다. 성서문자주의자들이나 창조론자들이 현대과학의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마냥 종교와 맞지 않는다고 보거나 신을 부정한다고만 생각해버리는, 그 생각과 신앙의 짧음에서 기인한다. 사실상 이점은 근본적으로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8. 모든 만물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떼이야르의 신관은 범신론인가? 아니다! 범신론적이지만 범신론은 아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것은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제자인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의 용어이기도 한데,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며,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는 에베소서 4장 6절의 말씀은 범재신론의 가장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현실 세계의 특성에 대한 사려와 함께 시작하는 어떠한 증명도 이 세계의 현실성 이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으며, 그것은 다만 경험되는 이 세계 안에서 드러난 모든 요인만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지극히 과학적으로만 발견할 수 있는 신의 양태는 내재적 신이지 전적인 초월적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떼이야르는 세계에 내재하는 '얼'이라는 것의 궁극적 시원이 당시 과학에서는 발견되진 않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육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분명 하나님은 육으로 오셨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쳤을 게다. 그리고서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커다란 '자율적인 중심점'을 제공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신과 인간의 화해와 통합의 장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통한 물질에 내재된 '얼의 신적 완성'을 뜻한다.
9. 떼이야르 사상의 현대적 의미
떼이야르의 사상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의 사상은 서양의 사상사에서 갑론을박하며 싸워왔던 정신이냐 물질이냐의 논쟁에도,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도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사변적인 관념론이나 물질을 먼저 내세우는 유물론이나 다들 대답의 반만 갖고 있는 셈이기에 둘 다 틀렸다고 봐야 한다. 이에 대해 떼이야르는 정신과 물질은 사물의 안과 밖의 모습일 뿐이며, 물질의 진화는 곧 궁극적으로 신의 창조사역이라고 못 박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과학을 넘는 종교로 귀의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환경문제를 중요시하는 생태학에도 여러 가지 사상적 근거를 안겨준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그냥 창조된 것이 아니라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설치고 비바람이 부는 인고의 세월을 거쳐서 잉태되는 것이기에, 그 생명 하나하나가 모두 다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저 들녘의 이름 모를 꽃 하나에도 이 우주의 숨결과 생명의 날줄 씨줄들이 얽혀있다. 역으로, 흘러가는 저 강물이 오염되면 우리 자신도 오염된다는 사실도 인지시켜 준다. 왜냐하면 나와 이 우주는 하나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세계의 문제는 우리 몸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가이아'GAIA라는 총체적인 이 지구 환경은 살아있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이며, 그것은 우리가 얘기하는 '얼'이라는 것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가 숨을 쉰다"는 표현이 마냥 지구를 단순히 의인화시킨 통속적 문장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지구는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부터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귀가 있어도 대지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에겐 화 있으리라!
무엇보다 떼이야르의 사상은 우리에게 고귀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연가풍의 시(詩)나 멜로물 영화에나 붙는 딱지가 아니라, 과학의 세계에서도 정말로 실재하는 창조적 에너지라는 점이다. 그것은 물질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세계 안에서 신의 기능이다.
존재는 서로 사랑함으로 인해서 존재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명령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것만이 인류의 살길이요 거듭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인류는 '진보'한다기보다 인류는 그저 '생존'할 뿐이다. 즉 인류의 진화는 인류의 생존과 바로 직결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자신의 생존에 대한 욕구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살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특히 현재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결국 우리 자신도 도태되고 만다는 현실을 아주 잘 말해준다. 내가 없으면 타자도 없겠지만 타자도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무의미하다. 사랑은 그렇게 나와 타자를 이어주며, 서로를 완성시킨다.
10. 나오며 : 사랑으로
▲ 'Pierre Teilhard de Chardin'(1881~1955) 삽화 | ||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않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한 자락 바람과 한 줌의 햇빛으로도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이 우주 세계에 충만한 신의 은총에 전율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이외 '진화냐 창조냐'의 문제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하는 월간 <기독교사상>1997년 2월호 "특집-창조신앙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에 실려 있는 여러 학자들의 글을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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