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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중심/계시/신비>를 빙자한 사유의 폭력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과 러셀 패러독스






 
<하나님 중심/계시/신비>를 빙자한 사유의 폭력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과 러셀 패러독스

 
 
흔히 말하듯 보수 기독교인 두고 종종 “묻지마 신앙인”이라고도 말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교리적 전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선 안되고 결국은 무조건 믿어야만 신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코 건들면 안되고 비판이 불허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여전히 전통 교리가 깨어지면 기독교 자체가 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현실이다.

이때 이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를 매우 강조하면서 이에 대해서 더 이상 캐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언뜻 보기에는 매우 하나님을 매우 높이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이 아닌가 라고 생각될 정도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겠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 중심 혹은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 중심이라는 이런 주장들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신학적 사유가 저지르는 또 다른 폭력의 위험성도 감지할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놓는다지만 실상 그 자리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의 언명과 행위가 중심으로서 놓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의 한계는 흔히 루터나 칼빈 등등 독일 및 유럽 계통의 신학들을 추구하는 사람들, 현대에선 더 뚜렷하게는 바르트 신학 추종자들에게서도 종종 보여지는 사유의 패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한지를 잘 살펴보자.
 
 
▲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칼 바르트는 나름대로 그 시대에선 최선을 다한 신학자였다고 본다.
정작 멍청한 것은 루터-칼뱅-기독교 전통 운운하면서 여전히 바르트의 신학을 끌어쓰고 있는 그 추종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사실상 바르트식 신학에 깔려 있는 그 사고 패턴의 폐해와 한계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흔히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계시 중심>의 신학자다. 그가 보는 성서 이해도 성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책이 아니라 인간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는 스스로 드러낼 뿐이지 그 어떤 인간의 것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에는 초월자인 하나님의 계시를 절대화함으로서 역으로 시공간의 모든 현실적인 것들은 상대화시켜버리겠다는 신학적 전략이 짜여져 있는 것이다.
 
당시 바르트는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 문명의 전적인 타락과 위기를 경험하였었고, 시대의 위기를 부르짖으며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되는 신앙적 토대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렇기에 히틀러의 독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든 것들은 상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물론 그 시대 바르트의 삶은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그 같은 바르트식의 사유 방식은 시대적 상황과 여건에 따라 좋을 수도 있지만 매우 나쁜 사유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같은 사유의 패턴을 꼼꼼히 살펴볼 경우, 그러한 상대화의 범주 속에 사실상 히틀러 뿐만 아니라 바르트 그 자신도 예외일 수 없기에 바르트 신학 역시 상대화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바르트 자신의 신학적 언명들만큼은 모든 상대화의 예외로 치부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가 철저히 바르트식으로 따른다고 할 경우에는 실상 그 자신도 상대화되어야만 하는 모순적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유 방식들은 흔히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것>을 중심으로 놓고서 실상 자신은 판단할 것은 다 하고 있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형극을 낳는 꼴인 것이다. 이를 테면 용왕을 믿는 <용왕교>의 그 어떤 교주가 “우리는 용왕님의 말씀만 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말했을 때, 용왕님을 모시고 있는 그 교주의 말은 진실로 용왕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교주 자신의 말인가?

논리학에서 이 같은 모순의 발견이 바로 수리논리학자이자 무신론자인 버트란트 러셀(B. Russell)에 의해 발견이 되었고, 그래서 이를 <러셀 패러독스>Russell's paradox라 고 부른다. 혹은 경우에 따라 <수행 패러독스>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자기 이론대로 충실히 수행을 하게 될 경우 자기 모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러셀의 이 유명한 발견은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이 치명적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논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흔히 잘 알려져 있는 기원전 6세 때 철학자이자 크레타 섬 사람이었던 에피메니데스가 외친 “모든 크레타 섬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거짓말쟁이 모순>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물론 모순에 대한 발견은 후세의 발견이며, 러셀 자신은 대중판 버전으로 '이발사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자기 자신을 그 어떤 집합의 구성원으로 하면서 그 자신이 그 집합에 대해 언급할 때는 반드시 모순에 직면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애초에 하나님의 계시와 신비 중심 어쩌구 하는 신학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나는 지금 논리학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나는 지금 바르트식 신학이 지닌 그 사유의 형식적 패턴이 낳고 있는 폐해와 한계를 그 치명적 문제로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렇기에 이는 비단 바르트 신학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외 비슷한 사고 패턴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인들을 비롯하여 (특히 종교 진영에서) 불가해한 영역을 빙자하여 자신의 입지를 중심화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인 것이다.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에는 하나님만이 절대로 숭상되면서 인간의 나머지 것들은 상대화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그 언명 자체는 절대화되고 있는가? 상대화되고 있는가? 즉, 은근히 바르트 그 자신의 신학적 언명들은 절대화되고 있으며, 하나님 위치에 놓여 있는 자기 모순을 낳게 된다는 얘기다. 물론 그 자신은 자기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진 몰라도 말이다.

하나님만을 높이고 모든 것은 상대화하면서 은근히 그 같은 자신의 주장과 언명은 중심적인 위치 즉,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는 이 같은 사유의 폭력성을 나는 지금 문제 삼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실상 꼼꼼하게 따져보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 중심으로 대체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이 같은 사유가 바르트 당시엔 하나님 위치에 있던 독재자 히틀러마저 상대화해버리는 좋은 기능으로서 발현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 그 자체는 바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저지르고 있는 횡포와 모순과도 매우 흡사하게 닮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하나님 중심/계시/신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종 부르짖는 그 <하나님 중심>이란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라는 게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더욱 철저하게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본다. 혹자는 철저히 묻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시나 신비가 퇴색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얘기야말로 더욱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계시나 신비에 대해선 묻지 말고 스스로 드러내도록 그대로 두어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의 기독교 신앙도 <묻지마 신앙>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또한 혹자는 철저히 묻는 것을 두고, 이를 ‘환원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들이야말로 <환원>과 <소통을 위한 설명적 해명>을 분명하게 혼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돈 큐빗(Don Cupitt)이 적나라하게 비판한대로 기독교인들은 그 자신들끼리만 통하는 비밀 용어들을 잘도 쓰고 있는 형국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계시'니 '성령'이니 어쩌구 저쩌구 하며 모임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이 뭐냐?” 물으면 “묻지마! 그냥 체험해!” 라는 말한다. 아, 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나는 그렇기에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성서비평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를 진보 신학자로 분류하거나 혹은 바르트가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를 온전히 극복했다고는 결코 보질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수행하고 있는 사유의 형식적 패턴 자체는 여전히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바르트식의 신학적 체계 역시 은연 중에라도 가부장적 사유 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흥미롭게도 가부장적 폐해를 극복하겠다는 국내 여성신학자들 중에는 멋모르고 바르트 신학을 추종하는 이들도 꽤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바르트가 그의「교회교의학」에서 가부장적 질서를 주장한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 참고로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종관계는 구조적이며,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여자의 신앙적 응답은 자기의 합당한 위치를 지키고 남자의 선도를 따르는 데 있다고 얘기했을 뿐만 아니라, 여자가 진정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항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한 여자의 반항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모독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남성 신학자였다. 또한 바르트의 신관은 상호 관계적 소통의 신관이 아니라 절대 타자로서의 초월 신관이자 결국은 일방 관계로서의 신관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마초적 성격의 신관이라는 점도 첨언될 필요가 있겠다).

“하나님 중심주의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하나님 중심을 부르짖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온갖 난리들을 펴대지만 실상 알고 보면 결국은 그 자신의 입장을 중심으로 놓고 있을 따름이다” 즉, 알고 보면 하나님을 모신다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배제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형국이라고 하겠다. 이는 평화의 이름으로 평화가 말살되고, 정의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의가 더렵혀지는 역설적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 중심/계시/신비를 줄창 강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일수록 합리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을 점점 설득해내기가 어려워지는 것도 알고 보면 지극히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 이면에는 바로 러셀 패러독스라는 논리적 모순을 해결해내지 못하는, 그 같은 사유 방식에 대한 필연적 한계가 은연 중에라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한계로 인해 보수 기독교인들은 합리적 설득 차원에선 제 풀에 지쳐 "신앙이 어떻게 합리적일 수 있느냐.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는 불가지적 입장으로 처리해버리고, 그리고 나서 전도 대상자들에겐 "믿어라, 직접 체험해보면 안다"는 이런 식의 강요적 태도로만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끝 으로 그렇다면 나 자신의 입장 즉, 나의 이 같은 주장들은 또 어떻게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당신도 그렇고 우리 자신들 모두 그 어떤 주장을 하더래도 결국 상대주의 입장에 처해 있을 수 밖에 없잖은가 라고 물을 수 있겠다. 그렇다! 인간의 그 어떤 주장도 그 출발에 있어선 절대화될 수 없다. 심지어 하나님 중심주의 주장 자체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인가? 인간은 결코 직접적으로 진리를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래서 나 자신은 <오류>와 <모순> 및 <비극>의 발견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은 그나마 <오류>와 <비극>을 통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당연히 나 자신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오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나의 이런 얘기들에 대해 그 어떤 얘기들도 기꺼이 환영하는 바이다. 참고로 나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 추구 방법에 대해서는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http://freeview.org/bbs/tb.php/b001/108 라는 글을 참조 바란다.
 
자신의 그 어떤 주장들도 예외 없이 결국 모든 주장들, 모든 이론들의 경합은 언어상에 있어서는 소통 차원에서의 설명력 확보 유무에 달려 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잊어선 안된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 중심/계시/신비> 어쩌구 강변하는 종교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관련글] 우리가 흔히 쓰는 신앙적 언명들의 무기력함과 공허한 비생산성
http://freeview.org/bbs/tb.php/b001/114 참조


* 출처 : www.freeview.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