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WHY : 왜 타인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해 확신에 찬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에서는 이타주의를 상호호혜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 설명은 마더 테레사의 헌신적인 사랑을 설명하지 못한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중에 무엇을 받기 위하여, 또는 천국을 가기 위하여 사랑을 베풀지는 않았으니까.
성서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계명을 주셨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런데 왜 그런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_-;;
불교에서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로 空을 말한다. 우주의 만물은 각기 존재하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므로 다른 생명을 사랑하는 일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정강길 선생님 말처럼 신의 장대한 계획 - 만인을 위한 세상- 을 실현하기 위해,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함일까?
음... 또는 계몽적 관점에서 만인은 평등하므로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걸까?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가장 와닿는 설명은 불교적 설명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니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택한다 하더라도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대치될 때 타인의 이익을 선택할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 타인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므로 타인을 위하는 것이지,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반할 때마저도 굳이 나를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대체 고통받는 생명을 위해 나를 버려야 하는 이유가 뭘까?!
사람 노릇하면서 사는 게 당연하지, 고통받는 생명을 보면 도와줘야 하는게 인지상정! 이라고 하신다면 나도 물론 동의.
하지만 그게 다란 말인가. 진화론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감정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보면 덜어주어야 한다는 건가.
이쯤되면 남편의 다소 씨니컬한 주장처럼 '어차피 지구는 언젠가 없어질텐데, 왜 굳이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평화로워야 하는건데? 사자가 물소를 잡아먹는게 당연한거야. 잡아먹히는 물소는 행복하지 않잖아. 인간 세상도 그래. 세상이 원래 그런거야.' 라는 말이 나오려 한다. -_-;;
이 문제는 '선과 악'의 시초와도 관련이 되는 것 같다. 타인을 위한 삶이 선이라고 느껴지는 이 감정은 단순한 사회화의 결과일까, 아니면 신의 존재 때문일까.
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아시는 분은 답글 좀 달아주세요. 나도 개과천선 하고 싶어요.
* 덧붙이기 : 나쁜 짓하면 지옥에 가니까 착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주신다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기에 이런 종류의 논의는 애초에 제외했음.
2. HOW : 타인을 위한 삶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WHY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고 치자. 타인을 위한 삶은 바람직하다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만인이 평등하게 행복하길 원하는 신의 뜻이라고 하자.
(선의 시초를 계속 거슬러 가보면 막판에는 신이 언급되는 것 같다. 이 또한 확실하지 않지만.)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정강길 선생님의 저서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 신학> 을 보고 상당히 감명받은 부분이라 옮겨 놓으려고 한다.
신은 모든 생명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이러한 신의 뜻을 깨닫고 있지는 않다. 많은 인간이 고통받는 생명을 도우려 하지도 않거니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만 바빠 고통받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인내심 강한 신은 끊임없이 인간을 설득 중이다. 저 많은 고통을 보라고. 그리고 나와 함께 모든 생명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속삭이면서. 신이 인간을 설득한다고 한 이유는 인간에게는 선택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해도 인간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신과 인간이 더불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개념은 '우선성의 원리 principle of preference'이다. 신은 모든 생명에 보편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통받는 생명을 그렇지 않은 생명보다 우선시 한다. 만약 고통받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에 똑같은 사랑을 준다면 여전히 불균형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모든 만물이 행복해지기 위해 일시적으로 고통받는 생명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것이다. 이를 정강길 선생님은 우선성의 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앞서 내가 언급한 '타인을 위한 삶'이란 정강길 선생님 입장에서는 우선적 민중 preferential minjung을 위한 삶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제까지 언급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신의 본성 + 개인의 결단 = 우선적 생명을 위하는 삶
(만물을 위하는 보편적인 사랑 & 우선성의 원리) (깨달으라는 신의 계시에 대한) (궁극적으로는 모든 생명의 행복과 평화)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해 확신에 찬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에서는 이타주의를 상호호혜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 설명은 마더 테레사의 헌신적인 사랑을 설명하지 못한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중에 무엇을 받기 위하여, 또는 천국을 가기 위하여 사랑을 베풀지는 않았으니까.
성서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계명을 주셨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런데 왜 그런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_-;;
불교에서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로 空을 말한다. 우주의 만물은 각기 존재하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므로 다른 생명을 사랑하는 일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정강길 선생님 말처럼 신의 장대한 계획 - 만인을 위한 세상- 을 실현하기 위해,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함일까?
음... 또는 계몽적 관점에서 만인은 평등하므로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걸까?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가장 와닿는 설명은 불교적 설명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니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택한다 하더라도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대치될 때 타인의 이익을 선택할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 타인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므로 타인을 위하는 것이지,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반할 때마저도 굳이 나를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대체 고통받는 생명을 위해 나를 버려야 하는 이유가 뭘까?!
사람 노릇하면서 사는 게 당연하지, 고통받는 생명을 보면 도와줘야 하는게 인지상정! 이라고 하신다면 나도 물론 동의.
하지만 그게 다란 말인가. 진화론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감정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보면 덜어주어야 한다는 건가.
이쯤되면 남편의 다소 씨니컬한 주장처럼 '어차피 지구는 언젠가 없어질텐데, 왜 굳이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평화로워야 하는건데? 사자가 물소를 잡아먹는게 당연한거야. 잡아먹히는 물소는 행복하지 않잖아. 인간 세상도 그래. 세상이 원래 그런거야.' 라는 말이 나오려 한다. -_-;;
** 취소선 그은 윗 문장은 제가 남편을 오해하고 적은 무지의 소산이예요. 남편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수정합니다. 미안해 남편- 내가 졸지에 남편을 살 의욕없는 허무주의자 & 회의주의자로 만들었네. 사실 남편의 저 말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남을 도우면서 살아야지'라는 뭇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했던 말이었습니다. 남편은 타인을 도와야 하는 이유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나는 경계가 없기 때문 - 모두 연결되어 있음- 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제가 그런 남편의 삶의 태도를 무시한 채 제 멋대로 남편의 말을 확대 해석했네요. 이 포스트 보고 앞으론 제 블로그 감시체제로 들어가야 겠다는 남푠-. 정말 미안해용!
이 문제는 '선과 악'의 시초와도 관련이 되는 것 같다. 타인을 위한 삶이 선이라고 느껴지는 이 감정은 단순한 사회화의 결과일까, 아니면 신의 존재 때문일까.
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아시는 분은 답글 좀 달아주세요. 나도 개과천선 하고 싶어요.
* 덧붙이기 : 나쁜 짓하면 지옥에 가니까 착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주신다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기에 이런 종류의 논의는 애초에 제외했음.
2. HOW : 타인을 위한 삶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WHY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고 치자. 타인을 위한 삶은 바람직하다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만인이 평등하게 행복하길 원하는 신의 뜻이라고 하자.
(선의 시초를 계속 거슬러 가보면 막판에는 신이 언급되는 것 같다. 이 또한 확실하지 않지만.)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정강길 선생님의 저서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 신학> 을 보고 상당히 감명받은 부분이라 옮겨 놓으려고 한다.
신은 모든 생명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이러한 신의 뜻을 깨닫고 있지는 않다. 많은 인간이 고통받는 생명을 도우려 하지도 않거니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만 바빠 고통받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인내심 강한 신은 끊임없이 인간을 설득 중이다. 저 많은 고통을 보라고. 그리고 나와 함께 모든 생명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속삭이면서. 신이 인간을 설득한다고 한 이유는 인간에게는 선택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해도 인간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신과 인간이 더불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개념은 '우선성의 원리 principle of preference'이다. 신은 모든 생명에 보편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통받는 생명을 그렇지 않은 생명보다 우선시 한다. 만약 고통받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에 똑같은 사랑을 준다면 여전히 불균형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모든 만물이 행복해지기 위해 일시적으로 고통받는 생명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것이다. 이를 정강길 선생님은 우선성의 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앞서 내가 언급한 '타인을 위한 삶'이란 정강길 선생님 입장에서는 우선적 민중 preferential minjung을 위한 삶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제까지 언급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신의 본성 + 개인의 결단 = 우선적 생명을 위하는 삶
(만물을 위하는 보편적인 사랑 & 우선성의 원리) (깨달으라는 신의 계시에 대한) (궁극적으로는 모든 생명의 행복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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