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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등등

실재하는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1. 한 스님의 강의

유튜브에서 한 스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불교의 깨달음, 즉 '있는 그대로를 올바르게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내용이었다.
요즘 배우고 있는 부분과도 관련이 있어서 아주 흥미롭게 봤다.



스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제의 세계는 내가 바르게 인식하던 잘못 인식하던 나의 의식과는 상관 없이 알아서 돌아가고 있다. 만약 내가 실재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면 두가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첫째, 잘못된 인식이지만 이로 인해 크게 문제가 없는 경우
둘째,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

첫번째의 경우, 법륜 스님이 드신 예는 농부의 예이다.  A라는 신을 믿는 농부는 농사가 잘될 때 자신이 A를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B라는 신을 믿는 농부는 자신이 믿는 신 덕분에 농사가 잘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농사는 애초에 농부가 믿는 신과는 관계가 없다. 농부가 A라는 신을 믿던 B라는 신을 믿던 농사는 실제 세계의 법칙대로 지어진다. 농부의 예처첨, 인간은 하나의 사상, 종교, 철학에 갇혀 있을 때 실재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착각은 농사를 짓는 데에 크게 지장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두번째의 경우처럼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일도 많다. 이는 마치 쥐가 살려고 쥐약을 먹었지만 죽는것과 같다.스님꼐서 두번째의 경우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이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설명을 덧붙이자면, 아마도 우리가 자신이나 타인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생기는 수많은 오해와 착각이 바로 이 두번째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상대방을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자신이 사랑한건 자기 자신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나 자신도 괴로울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주기 쉽다. 실재를 잘못 인식하여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이다.
 
따라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실제의 세계와 내가 인식하는 세계 간에 차이가 있을 때 우리는 괴로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올바른 인식, 즉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곧 석가모니이며,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도들의 목적이다.


2. 우리는 실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2.1. 철학자 - 실재의 올바른 인식은 가능하지 않다

농부가 실재하는 법칙을 올바르게 인식하던 그렇지 않던 그 법칙은 항상 존재하고 그대로 흘러간다는 스님의 말씀은, 주체가 인식하던 인식하지 않던 세상은 존재한다는 철학적 접근과 비슷하다. "실재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철학의 큰 주제이다. 내가 경험하는 세상이 실제로는 우리 경험과 다른 세상이라면 이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이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우리의 감각 정보일 뿐이라고 주장했었다. 내 앞에 놓여있는 탁자는 실재하는 탁자가 아니라 나의 감각 기관으로 들어온 데이타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진정한 탁자를 볼 수 없다. 그저 탁자의 그림자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Russell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탁자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sense-data를 통해 실재하는 탁자의 일부분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탁자의 진정한 모습이 있기나 한걸까?
세상은 우리의 sense-data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는 진정하고 실제적인 세계를 꼭 전제해야 하는걸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실재하는 세계는 "없다". 모든 건 우리의 감각정보일 뿐이다.'라고 급진적으로 주장한 사람들을 idealist라고 한다. 곧 우리가 감각 기관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만약 그 어느 누구도 이 나무를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그 나무는 세상에 존재하하지 않으며, 누군가가 그 나무를 보거나 만질 때, 그때서야 나무는 존재하기 시작한다.

Russell은 이러한 idealist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만약 실제의 세계는 없고, 모든 것이 우리의 감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설명하기가 너무 복잡해진다고.
내가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고 있는데, 어느 날 고양이를 집에 두고 하루 종일 외출했다가 밤 늦게 들어와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나는 아침에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집을 나갈 것이다. 집에는 고양이뿐, 다른 누구도 없다. 나는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밤 늦게 들어왔다. 고양이는 나를 보자 마자 밥을 달라고 재촉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제 이 상황을 idealist의 주장대로 해석해 보자.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고양이를 인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아침에 밥을 주고 집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고양이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밤에 돌아와서 다시 고양이를 인식했을 때부터 고양이는 다시 존재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고양이의 배고픔이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고양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고양이는 배고플 새가 없었을 것이다.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침에 자신은 밥을 먹었고, 주인이 나가자 세상에 없었다가(밥을 소화시키고 에너지를 쓸 시간이 없다) 주인이 돌아오자 다시 뿅 나타나는 거다. 즉 고양이는 주인이 밤에 돌아왔을 때 계속 배가 불러 있는 상태여야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고양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던 그렇지 않던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이렇게 간단한 현상을 idealist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렵게 된다. 설명력이 부족하므로 좋은 이론이 아닌 것이다.

http://i.kdaq.empas.com/imgs/qrsi.tsp/5969811/10611114/0/1/A/%EA%B3%A0%EC%96%91%EC%9D%B4.JPG

요렇게 깜찍한 놈이 보지 않을 땐 없어진다면 너무 아쉽잖아. =.=



2.2. 불교도 - 실재의 올바른 인식은 가능하다


Russell의 반박으로 idealist의 주장은 빛을 잃었다. 실재하는 세상은 누군가가 인식하던 하지 않던 항상 존재하며 나름대로 움직인다.  앞서 스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이 실재하는 세계, 그리고 이 세계가 돌아가는 법칙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느냐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를 감각 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것도 일부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철학의 논의는 여기에서 끝나는 듯 하다. 그러나 종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으로 불교에서는 실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깨달은 사람인 석가모니를 모델로 그의 수행 방법을 배우고,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쉼없이 수행하기를 권한다.

철학의 결론대로, 우리는 감각 정보를 통해 실재를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실재를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깨달은 사람들이 적지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 수행의 시간이다. 석가모니가 진짜 깨달았는지 안했는지 내가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이 부분은 미스테리이지만, 난 깨달았다고 믿기 땜시롱 나의 결론은 이러한 거지-. 이제 나에게 필요한건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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